걸으며 생각한 것들 (3)

김재원

·

2021. 3. 6. 02:20

© 김초엽 작가의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중에서

1. 장기하가 혁오의 'Silverhair Express'를 리믹스하면서 내레이션으로 쓴 구절들을 듣고, 뭐지? 싶었다. 마치 한창 SF/판타지 소설에 심취해있었던 중학생 때로 돌아간 것처럼 간만에 상상이란 걸 하게 되더라.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에 있었지'라거나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같은 구절들은 우주판 Black Mirror가 나온다면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난 이 구절들이 김초엽이라는 작가가 쓴 소설의 일부라는 걸 찾게 되었고, 이 작가와 소설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2. 마침 지난 한남동 걷기 모임의 종착지는 스틸북스. 난 김초엽의 소설이 생각났고, 책을 찾아내자마자 장기하가 노래했던 그 부분이 나오기까지 재빠르게 페이지를 넘겨댔다. 원래 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 편인데, 목소리로 듣던 걸 활자로도 마주해보니 이 책의 나머지 부분도 자연스레 궁금해지더라. 근데 그달에 스스로 약속했던 생활비의 잔고가 얼마 남지 않아 거기서 바로 책을 사진 못했다.

3. 얼마 지나지 않아 교보문고에서 eBook으로 이 책을 구매했다. SF소설이니까 eBook으로 읽어볼까? 하는 우스운 생각으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걸! 첫 단편으로 실려있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부터가 압도적이다. 과학적 설정을 도구 삼아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특히 인간의 사랑과 선택을 통찰해낸 작가의 능력에 내 마음은 관통당했다.

두 번째 단편인 <스펙트럼> 또한 내가 요즘 고민하는 것 중 하나인 인간의 관계 속에서 합리성이 지니는 한계에 관한 내용 같아 재밌게 읽었다. 영화 ⌜컨택트⌟ 같기도 했고. 남은 다섯 편도 기대가 된다.

4. 우리는 막연히 성장하려고만 하고, 논리적으로 완벽한 방향을 향해 가는 것을 목표로 삶을 산다.
그게 내가 원해서이기도 하지만,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것 같아서일 수도 있다. 또 그게 어느 정도의 돈을 보장해주기도 하고.

그치만 정작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서 비롯되며, 난 사랑을 '그 대상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이라고 보는데. 그 궁금함을 이어나가다 보면 그 대상의 세계를 공감하고 존중하게 되고, 그의 세계를 지켜주고 싶은 지경까지 다다르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남들이 원하는 삶, 세상이 원하는 나보다는 내가 궁금해하는 것, 내가 사랑에 빠지는 것, 그렇게 내가 공감하는 것에 아직도 더 집중하고 싶고, 설령 그것들이 너무 좁은 영역에 속할지라도 "시장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싶지는 않다.

5. 물론 내 주머니에도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도 세상의 대단한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그러나 인생 최대의 적은 비교와 조급함이다. 걷기와 같은 일상적인 습관들로 이것들을 털어내고, 다가오는 사랑에 집중하자. 그게 요즘 내가 느끼는 삶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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