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라이프 & 오! 수정|어쩌면 우연? 어쩌면 의도!

김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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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28. 01:30

한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뺨을 맞으며 이별 통보를 받는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도 남자는 여전히 그날의 일을 마치 슬픈 발라드 노래 속 가사처럼 떠올리며 눈가를 촉촉이 적신다. 하지만 정작 여자는 아직도 그 남자와의 지난 연애를 생각하면 고작 뺨 한 대 때리고 헤어지기엔 너무 억울했다며 아쉬워하고 있다.

서로 같은 사건을 떠올리면서도 어떤 사람은 슬픔을 느끼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억울함을 느낀다. 이렇듯 기억이라는 것은 기억하는 사람이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1998년 작인 영화 ⌜원더풀 라이프⌟는 이러한 기억의 상대성을 '달'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 영화 ⌜원더풀 라이프⌟

달은 항상 똑같은 모습인 것 같은데... (각.도.의.중.요.성)

영화 속 '달'에 대해 한 등장인물은 "(달은) 항상 똑같은 모습인 것 같은데,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달은 우리가 겪은 사실을 의미한다. 객관적인 사실은 일어난 순간부터 절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사실을 기억하는 우리들이다. 달이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듯이 우리의 기억도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왜곡되기 때문이다.

극 중 모치즈키와 시오리가 함께 달을 보는 장면에서 달이 여느 때처럼 평범하다고 느낀 시오리와 달리 모치즈키는 그날따라 달이 예쁘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모치즈키는 자신의 담당인 와타나베가 자신의 약혼자였던 쿄코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심란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그때그때의 감정에 따라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기억은 얼마든지 주관적으로 왜곡될 수 있다.

© 영화 ⌜오! 수정⌟

어쩌면 우연? 어쩌면 의도!

한국 영화 중에서도 이러한 기억의 상대성을 주제로 한 영화가 한 편 있다. 바로 홍상수 감독의 2000년 작인 오! 수정이다. 이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어쩌면 우연>이라는 부제 아래 재훈이라는 남자의 시각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재훈은 아는 형인 영수를 통해 그와 같이 일하는 수정을 알게 되고, 그녀가 영수의 여자라고 짐작됨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쟁취하려고 마음먹는다. 수정과의 우연한 만남이 반복되면서, 재훈은 이를 틈 타 수정과의 관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만들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수정은 그러한 재훈에게 이끌려가는 순종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재훈의 기억에 대한 수정의 진술은 정반대로 흘러간다. 전반부에서는 마냥 순진한 여자로 묘사되었던 수정이지만, 오히려 그녀의 입장에서는 우연을 가장하여 재훈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 자신이었으며, 그 이후로도 재훈과의 연애에서 주도권을 쥔 건 줄곧 자신이었음을 밝힌다. 그래서 후반부의 부제가 <어쩌면 의도>였나보다.

너에게는 배신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당연한 처사

위의 두 사람은 분명 같은 사건을 겪었다. 하지만 각자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보니 결국 두 사람의 기억 사이에 많은 차이가 발생했다. ⌜원더풀 라이프⌟에서 와타나베와 쿄코 부부 역시 몇십 년을 같이 지내오며 많은 경험들을 공유했다. 그러나 와타나베에게 있어 쿄코와 함께 나눈 기억이 가장 소중한 기억이었다고 해서, 쿄코에게도 그 기억이 가장 소중한 기억이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쿄코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에 모치즈키가 함께했다고 해서 모치츠키도 그녀와의 기억을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겨야 할 이유도 없다. 그만큼 기억은 사실과 다르다는 걸 두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는 ⌜원더풀 라이프⌟라는 영화를 보면서 쿄코 혹은 모치즈키를 자신과의 기억을 선택해준 사람에 대한 배신자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기 자신부터 돌아보자. 혹시 당신도 헤어진 여자친구가 당신의 뺨을 한 대밖에 때리지 못한 것에 억울해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 못 하고 있지는 않은가?

p.s. 이 글은 대학교 3학년이었던 제가 1학년 교양과목인 계열별 글쓰기 과목에서 '비평적 글쓰기'에 대한 과제로 제출한 글임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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