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인생이 무상이거늘 어찌 아직도 매여있는가

김재원

·

2021. 3. 28. 02:15

© 영화 ⌜그래비티⌟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은 주말이었다. 오랜만에 무려 이틀간 24시간이라는 수면시간을 기록할 정도로... 하지만 24시간의 수면시간도 나의 공허함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사람이 무언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과업을 짊어지게 되었을 때 느끼는 무력감과 함께 '에라이' 마인드까지 겹쳐 불어닥친 나의 내면은 마치 닥터 스톤이 고칠래야 고칠 수 없었던 통신 시스템 같았다.

지난 금요일, "이걸 어떻게 고쳐야 하지? 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인 거야?"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거의 다 잠식해가던 순간, 펑! 내 머릿속의 인내 게이지는 마치 망할 러시아 놈들의 뻘짓거리로 날아온 잔해에 부딪혀 폭발하고야 말았다. 현실이라는 우주선과 나 사이를 연결하는 정신줄도 그와 함께 뚝! 끊어졌고, 난 저 멀리 우주선이 보이지 않는 우주로 던져졌다.

그 이후로 나는 침대에서 허상의 공간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몸은 누워있지만, 빙글빙글 돌아가는 내 뉴런 속 상념들은 멈출 줄을 모르고, 솔직히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우주 속을 배회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깨닫는다.

"내가 아까 그 시스템을 조금이라도 더 고쳐보겠다고 집착하지 않았다면, 샤리프가 죽는 걸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그 일을 억지로 떠맡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무기력하게 누워있었을까?"

비록 이러한 고민의 무한 루프로부터 날 구원해준 사람은 없었지만, 영화 속 닥터 스톤에게는 코왈스키라는 구원자가 있었다. 이 잘생긴 구원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약간의 충돌은 기꺼이 감수한다. 그리곤 모든 상황을 안정시키고, 숨이 차오르는 스톤이 실존의 영역으로 한 발짝 또 한 발짝 내디딜 수 있도록 돕는다. 나중에 다시 등장할 때(물론 허상이었지만), 역시 그는 그녀의 생의 의지를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결국, 이러한 의지의 내외적 부활로 인해 그녀는 다시 태어난다. 처음 우주정거장에 들어가는 순간, 우주복을 벗고 허리를 웅크린 그녀의 아기 같은 자세에 절묘하게 탯줄로 보이게끔 줄을 매칭시킴으로써 그녀가 우주에서 다시 잉태됨이 표현되고, 지구에 성공적으로 착륙한 뒤에 양수와 같은 바닷물을 거쳐 땅으로 기어오르다 결국 두 발로 딛고 일어서는 장면에서는 비로소 두 번째 탄생에 성공한 데에서 난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

'닥터'라는 호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자기 분야의 독보적인 권위자였고, 심지어 생명을 치료하는 곳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주라는 거대자연 속에서 그녀의 학위, 능력, 재산 등의 삶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희미한 강아지 소리에도 환한 웃음을 짓는 어린아이로 돌아갔다. 거대자연 앞에서 무의미를 느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을 것이다. 우리는 우주 위의 한 점일 뿐이다.

바로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되돌아본다. "과연 나는 나를 대표하는 수많은 껍데기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나 자신보다 얼마나 다른 것들을 우선시하고 있으며, 또 얼마만큼 그것들에 집착하고 있는지"야말로 이 영화가 던지고 있는 주된 메시지가 아닐까?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 집착으로부터 줄을 끊고, 약간은 빙글빙글 돌고 여기저기 부딪히더라도 보다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제대로 해석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주말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어 가뜩이나 무기력한데 술까지 한 잔 마셔버린 한밤중의 나로서는 이 영화가 이렇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