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며 생각한 것들 (6)

김재원

·

2021. 3. 9. 10:00

불안에 떨고 있던 로밀리를 워크맨으로 다독여주는 쿠퍼 © 영화 ⌜인터스텔라⌟

1. 심연의 우주 속에서 한없이 작아진 나머지 불안에 떨고 있던 로밀리를 쿠퍼가 다독여주는 장면이 있다. 쿠퍼는 그에게 자신감을 가지라며 시덥잖은 말들을 늘어놓다가, 지구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진 우주선에서 가장 아날로그스런 기계로 남은 위로를 대신하며 조용히 자리를 뜬다.

아마도 우주로 떠나오기 전, 구식 워크맨으로 녹음해둔 지구의 소리일 텐데. 들어보면 별거 아닌 빗소리, 벌레의 울음소리, 천둥 치는 소리지만 불안감에 잔뜩 긴장해있던 로밀리는 이 소리들을 듣자 이내 풀어지고야 만다.

2. 이윽고 가만히 자세를 고쳐 앉아 자연의 소리에 집중하던 그의 모습은 마치 내가 우울했던 나날들 가운데 툭하면 산책하며 걷던 모습과 비슷하다. 갑작스레 우울감이 엄습해 과거부터 미래까지의 온갖 걱정들을 긁어모아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사람이 되기 직전일 때면, 난 운동화 끈을 동여매고 일단 밖으로 나가버리곤 했다. 방법을 알았다기보다는 그것밖에 할 수 없었을 때였다는 쪽에 더 가까운 행동이었다.

3. 서울에선 돈 없이 갈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았고, 갈 곳이 없으면 정처 없이 걷는 것만이 선택지로 남게 되는데. 그렇게 걸으며 자연스레 듣게 된 소리는 다른 어떤 시공간의 소리도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소리라는 걸 몸에서부터 깨닫기 시작하더라. 걸음마다 의도치 않게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재의 순간과 장소에 집중하게 되었고, 실체 없이 일렁이던 불안감은 점점 사그라드는 게 신기했다. 아니, 행복했다.

4. 그렇게 몰입의 중요성과 이를 위해 날마다 걸어야 하는 이유를 홀로 쌓아온 지도 어느덧 1년 반이 흘렀다.

© 영화 ⌜인터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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